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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별사탕 리뷰

[영화 후기/리뷰] 버닝. 끝나도 한동안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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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작가 우주써니입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을 보고 왔는데요. 


평가가 극과 극이라고 하여 과연 나는 어느 쪽일까 궁금했는데, 결론적으로는 보는 동안, 그리고 보고 난 후에도 수많은 메타포와 미스테리, 그리고 공들여 한땀한땀 만든 영화적 문법들을 해석하는 재미가 쏠쏠한 영화였습니다. 그럼에도 영화의 백미여야 할 클라이막스가 어쩐지 직관적이지가 않고 꼬아서 만들어진 느낌이라 아쉬웠는데요.


사실 첫 인상은 단번에 소화되지 않는 식사를 어리둥절하게 먹어버린 듯한 느낌이었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로 사흘이 지난 지금에서야 어느정도 소화가 된 듯한 느낌이네요.

제 생각에 이 영화는 하나의 컨텐츠임에도 모든 관객에게 동일한 느낌이나 감정 혹은 해석을 요구하는 영화가 아니라, 관객들 각자의 경험과 느낌들을 소화기관으로 사용하여 서로 다르게 해석되길 원하는 그런 영화인 것 같습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것을 믿게 되는 주인공처럼, 관객들도 각자 자신이 믿고 싶은 결말을 찾게 될 거 같은데요.


물론 열린 결말이라는 엔딩이 정형화된지 오래지만, 이처럼 결말 뿐 아니라 영화 내용의 모든 것을 펼쳐놓고 감독이 조금은 나몰라라 하는 느낌으로 끝맺는 작품은 처음이었네요. 이런 시도가 좋다 나쁘다를 떠나 조금 생경한 느낌이지만, 역시나 흥미롭다는 건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제 진실을 얘기해 봐!'라고 말하는 포스터의 문구에 대한 답으로 이제야 겨우 '오케이, 나는 <버닝>을 이렇게 해석하기로 했어!' 하고 맘을 정하게 되었는데요. 물론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전제처럼 진실이란 각자의 진실일 뿐이니, 저의 해석 또한 저만의 것이겠죠.


(** 사진 아래는 영화 내용 및 결말에 대한 스포가 가득합니다. 미관람하신 분들 주의해주세요!)


버닝 포스터


이 영화는 <버닝>이라는 영화 제목처럼 '타는' 이미지가 참 많이 등장했는데요.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로 시작한 영화는 마지막 살인 방화의 화염으로 끝을 맺습니다. 퍼스트 컷의 담배 연기는 극 전반의 알수 없는 미스테리를 상징하기도 하고, 조그마한 불씨에서 시작해 활활 번져버린 분노의 시작과 끝을 이미지적으로 보여주는 듯도 합니다.


제가 생각했을 때 버닝의 등장인물들은 현 시대가 빚어낸 결핍된 인물들로 보이는데요. 그들은 하나 같이 뭔가를 태우거나 혹은 태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입니다. 허무, 허탈함, 허망함, 지루함, 알수 없음, 의미없음, 재미없음, 분노의 공기로 숨을 쉬는 그들은 결핍된 영혼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뭔가를 찾지만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건 고작 담배 연기를 태우는 것 뿐인데요. 당연히 담배나 대마초 따위를 제물로 삼아서는 결코 행복해지지 못하는 그들은 다른 제물들을 찾아 스스로를 채우려고 합니다.


위대한 개츠비처럼 뭘하는지 모르지만 돈이 많은 벤(스티븐 연)은 언제나 여유롭고 완벽해 보이지만, 사실은 눈물을 흘리지도 못하는 결핍된 사람입니다. 돈이 넘쳐나듯 많지만 감정이 말라버려 스스로는 도무지 가슴 속 베이스를 울리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인데요. 그는 남의 집 비닐하우스를 몰래 태우는 일을 할 때에만(혹은 살인 후 시체 인멸 방화를 하며) 겨우 가슴 속 울림, 즉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한편 존재이유를 끊임없이 찾는 해미(전종서)는 스스로가 그레이트 헝거임을 모른 채 자신을 장작처럼 혹은 연기처럼 태워버리고 싶어합니다. 노을처럼 흩어져서 이대로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그녀는 스스로를 제물 삼아 자유를 찾고 싶어 합니다. 그녀가 노을 속에서 탈의를 하며 추는 그레이트 헝거 춤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녀가 사실은 세상의 규정속에 속박되었던 인물이기 때문인데요.


버닝의 해미(전종서 분)


남의 시선을 신경 안 쓰는 듯한 그녀는 사실 첫사랑 종수(유아인)가 '너 못생겼어'라고 한 말을 기억하고 성형수술을 한 인물입니다. 나중에 나레이터 모델 동료가 하는 대사처럼 그녀 또한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해 스스로를 끼워맞추려고 한 과거가 있었던 건데요. 그런 그녀가 자신의 존재를 멋대로 재단하는 세상에 대한 환멸과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이유에 대한 답을 찾아 하늘에 구애하듯 추는 춤은 아주 찰나일지언정 그녀에게 진정한 자유의 순간을 선사한 듯 했습니다. 그래서 노을을 배경으로 스스로를 불태우는 성냥개비처럼 타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고 인상적이었는데요.


하지만 그 애처롭고 자유를 향해 날고자 하는, 마른 우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아이(어쩌면 우리 모두의 모습인)의 춤을 보고도 첫사랑 종수는 '남자들 앞에서 옷을 벗는 건 창녀나 하는 짓'이라고 또 다시 규정을 해 버립니다. 세상의 끝(아프리카)까지 가서 결국 혼자임을 깨닫고 온 해미에게 좋아하는 사람의 그 말은(게다가 우물에 빠진 자신을 예전에 구해준 적이 있던 한 때 구원자였던 그의 말은), 다시 한번 마른 우물에 혼자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했을 것 같은데요.


그 후 해미는 영화에서 완전하게 사라집니다. 그녀가 벤에게 살해를 당한 것인지, 아니면 자살을 한 것인지 혹은 혼자 또 다른 여행을 떠나 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는데요. 아무 말도 없이 발자국 소리만 들리다 끊어지는 수상한 통화소리는 사실 첫번째와 두번째의 가능성을 높이지만, 영화 초반에 갑자기 뚝 끊어져버렸던 해미의 통화를 생각하면 세번째 가능성도 영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버닝의 종수(유아인 분)


이처럼 그녀의 실종에는 위의 세 가지의 가능성이 모두 있지만, 종수는 진실을 찾아 헤맬수록, 점점 한 쪽으로 생각의 방향을 굳혀 가는 듯 보여집니다. 이는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가슴속 분노의 불씨에서 기인한 듯 한데요. 종수는 참고 참아도 억눌러지지 않는 자신의 분노를 활활 태워줄 불쏘시개나 제물을 찾듯 벤에게 집착합니다.


사실 세 인물 중에 가장 뜨거운 인물은 바로 종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셋 중에 가장 생기없게 표현되는 캐릭터지만, 가슴 속에는 영화의 퍼스트컷의 담배 불 같은 작지만 모든 것을 태워버릴 분노의 불씨를 품고 있는 인물인데요. 게다가 뭔가를 창조하고 싶다는 열망의 불씨까지 있는 인물입니다. 종수는 암울한 이 시대의 울분과 식어버린 꿈을 응측한 듯한 캐릭터로 보였기 때문에 더 안쓰럽고 연민이 갔는데요. 그래서 그가 결코 불행해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해미가 실종된 후 벤을 의심하며 그녀를 찾아다니는 종수는 세상에 분노한 듯, 세습되는 가난과 유전자에 분노한 듯, 벤에 대한 질투와 열등감에 폭발한 듯 하지만, 사실은 스스로에게 가장 분노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소설을 쓰고 싶다는 열망(불씨)은 있지만 뭘 써야 할지도 모르겠는 좌절감과, 분노조절이 있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피에 대한 분노, 자신을 버린 엄마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내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자괴감, 게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모욕적인 말로 상처를 준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까지... 


그리고 한 가지 더 죄책감에 시달리는 듯 보였는데요. 영화 속에서 꿈처럼 등장하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며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을 짓는 어린 종수의 모습은, 개인적으로 엄마의 옷을 태우며 느꼈을 슬픔과 분노, 더불어 은연중에 엄마에게 복수하며 느꼈을 달콤한 죄책감을 회상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즉 엄마와 아빠에 대한 복수심과 사회에 대한 맹목적인 분노는 종수에게 죄책감을 가지게 했고, 그것은 해미에게까지 확장되는 듯 보였는데요. 


종수는 어쩌면 자신의 모욕적인 언사 이후, 그녀가 자살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무의식적으로 알면서도 무시한 듯 합니다. 깨끗하게 신변정리하듯 치워진 집과 남아 있는 캐리어를 보면 충분히 자살의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었을 텐데요. 하지만 그녀의 자살에 대해 자신의 책임이 조금이나마 있을까봐 너무나 무섭기 때문에 반대 급부로 그녀가 살해됐다고 믿고 싶어하는 듯 합니다.


버닝 스틸 컷


그럼에도 개인적인 판단으론 마지막 종수의 살인장면이 종수의 소설 속 장면으로 생각되는데요.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냥 보는 순간 그렇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감독이 '해미의 집에서 종수가 소설을 쓰는 장면'을 굳이 살인 시퀀스 앞에 배치한 의도가 있을 거라 생각되는데요. 사실 영화 문법상, 그리고 맥락상 마지막 시퀀스는 소설일지도 모른다는 뉘앙스를 일단 피웠다는 점에서, 관객이 소설로 생각하냐 아니냐는 선택의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결국 믿고 싶은 걸 믿을 수 밖에 없는, 우물에 갇혀 제각각 하늘을 올려다보는 버닝 속 등장인물과 같은 입장에서 저는 마지막 시퀀스가 소설이라는 결말로 해석하고 싶은데요. 왜냐하면 정말 종수가 살인을 저지른 거라면 아무런 메시지도 희망도 없는 허무한 이야기가 돼 버리기 때문입니다. 버닝이란 게 질투나 분노에 휩싸인 걸 의미할 수도 있지만, 저는 기왕이라면 희망적인 쪽을 선택하고 싶은데요.


그래서 저는 종국에는 종수가 소설을 쓸 마음 속 불씨를 찾아내고 분노를 창작으로 표출한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엔딩에서 분노를 살의와 함께 활활 태워버리고, 죄책감과 피로 물든 옷도 같이 태워버린 채 알몸으로 도망치듯 트럭을 모는 종수의 모습은 마치 뜨거운 분노로부터 달아나는 듯 보였는데요. 트럭 뒷유리창으로 멀어지는 거대한 분노의 화염과 갑자기 떨어지기 시작한 하늘의 눈과 비는 만약 그 장면이 소설이라면, 현재에 존재할 종수는 새로 태어났음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화염은 멀어지고 그 화염(분노)을 식혀줄 비가 찾아오고 있으니까요.


결국 저는 모든 분노를 창작적 연료로 전소시킨 후 알몸 즉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났을 소설 밖의 종수의 모습이 숨은 결말이라 생각하고 싶은데요. 논밭이 불탄 후 더욱 비옥해지듯, 이 시대의 암울함을 혼자 짊어진 듯한 종수가 더욱 비옥해진 모습으로 살아있을거라 상상하고 싶어지네요. 사실 마지막 장면이 소설이라면 충분히 그려지는 종수의 모습이기도 하구요. 


결론적으로 감독은 절망속에 존재하는 현재 20대의 모습을 처절하게 담아내면서도 그안에서 조그마한 희망이라도 주고 싶었기 때문에 '소설일지도 몰라'라는 뉘앙스를 풍긴거라 생각되는데요. 영화라고 해서 마냥 낙관적으로 담아내긴 현실과의 괴리 때문에 조금이나마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 거라 생각되네요. 물론 이것 또한 어디까지나 저의 해석일 뿐이지만요. 


다만 어쩔 수 없이 아쉽기는 한데요. 제가 생각하는 영화의 미학적 가치는 클라이막스에서 한방에 느껴지는 감정 혹은 카타르시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집에 와서 며칠 지난다음에야 정리되고 소화되는 영화가 결코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네요. 새로운 시도라 흥미진진했지만, 이런 문법은 결국 대중들의 외면을 받을 거 같긴 하네요.


음, 그 외에도 배우들의 호연이 정말 인상적인데요. 첫작품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전종서와 살인자인지 아닌지 결단코 알 수 없는 그 미묘한 톤을 소화해내는 스티븐 연, 그리고 시종일관 멍한 표정의 유아인은 존재감 하나만으로도 날개가 꺾여버린 20대를 상징하는 듯해서 감탄했는데요. 사실 배우들의 연기만으로도 정말 보는 동안에는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이미 유명해진 장면이지만, 셋이서 바라보는 노을 장면은 정말 극도의 아름다움으로 연출되는데요. 그 장면에서 그레이트 헝거 춤을 추는 전종서를 이길만큼의 아름다움은 한동안 찾아 보기 어려울 듯 하네요!


이창동 감독의 <버닝>! 보고 난 후에도 며칠 동안 계속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영화! 제 별사탕점수는요.

여러가지 메타포와 의미를 해석하는 재미가 쏠쏠하지만, 그럼에도 클라이막스에서 카타르시스를 직구로 던지지 못한다는 점에서 5별사탕 만점에 3.5별사탕이구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영화평이니 다른 리뷰도 참고하시고 관람여부 결정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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